슬픈 빙하시대 2
허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
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눕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
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
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
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
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허연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세상을 안다는 것은 상처없이는 이를 수 없는 길이어서
난 원치않게도 내가 세상을 알아야 할 때마다 슬퍼졌다.
모르면 모를수록 우린 무엇에든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머뭇거림 없이 단숨에 어딘가에 훌쩍 뛰어들 수 있는 마음...
난 그걸 순수라 말하고 싶다.
바보처럼 피투성이가 된다해도
다신 뛰어들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해도
처음이라는 단 한 번은 순수했기에 매번 아름다웠다.
청춘이 그랬고 첫사랑이 그랬듯이.
이젠 청춘도 가고 사랑도 갔다.
알아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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