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kiku929 2010. 1. 18. 20:39

 

 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 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 간 것들을 옮겨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창비

 

 

 

 

만남만큼 중요한 것은 헤어짐이라고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살았습니다.

 

한 시절을 잘라내는 일은

결코 모질어선 안된다고,

겨울의 시간만큼은 품안에 오목히 담아둬야 한다고,

 

처음을 생각하고 지나온 일을 생각하고

가슴에 품고 품다가

살며시 보내줘야 하는 거라고...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운목 / 유홍준  (0) 2010.01.18
삶 / 푸쉬킨  (0) 2010.01.18
앵두 / 고영민  (0) 2010.01.18
마디, 푸른 말 한 마디 / 정일근  (0) 2010.01.18
장항선 3 , 장항선 4 / 문동만  (0) 2010.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