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 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 간 것들을 옮겨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창비
만남만큼 중요한 것은 헤어짐이라고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살았습니다.
한 시절을 잘라내는 일은
결코 모질어선 안된다고,
겨울의 시간만큼은 품안에 오목히 담아둬야 한다고,
처음을 생각하고 지나온 일을 생각하고
가슴에 품고 품다가
살며시 보내줘야 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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