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인지 어떤 내용인지도 지금은 희미하지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마도 일본 사무라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한 부하가 대장을 찾아와 자신이 적군의 우두머리를 죽이겠으니 허락해달라고 말을 한다.
이때 그 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에게 물어본 이상 난 그 일을 너에게 허락해줄 수 없다"라고...
이처럼 사람은 입장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나름대로 주어지는 것 같다.
학생이 교칙을 어기는 어떤 행위에 대해 교사가 학생을 개인적으로 이해해서
모르는척 눈감아줄 수는 있지만 학생이 교사에게 직접 허락을 구한다면
교사는 '안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듯이 교사에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연인관계에서도 자신이 상대보다 더 나은 환경을 가졌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과
그렇지 못할 때 취할 수 있는 행동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때의 관계의 주도권은 더 나은 환경, 행복을 줄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의 쪽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가 말 할 수밖에 없는 정답을 이쪽에서 이미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않으면 관계가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관계란 반드시 '나'와 결합되는 '너'라는 타인이 있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타인에 의해 나의 역할 또한 언제나 바뀌게 된다.
나라는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고 동일한 사고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관계에서 주어진 역할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따금 나는 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엄마로서 허락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 거짓말 하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 딸은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원하지만
나의 입장으로선 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차라리 거짓말을 해줬으면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럼 난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줄 수는 있겠지만 내게 정식으로 허락을 구한다면
난 "안 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딸은 모를 것이다.
언젠가 그런 말을 지나가듯 해준 적이 있지만 딸들이 이해했을 지는 모르겠다.
2010.3.27. 모닝 커피를 마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