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시/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김남주 옮김)

kiku929 2010. 1. 11. 17:48

 

              

 

 

 

 

근래에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소리내어 웃으며 책을 읽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40년동안 교단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온 교사 에밀은 정년퇴임을 하고 부인 쥘리에트와 함께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 한적한 마을에 한눈에 반해버린 <우리 집>을 갖게 된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오로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꿈꾸며...

옆집이 하나 있었는데 다행히 의사가 사는 집이라고 하니 나이든 이 부부에겐 얼마나 행운이겠는가.

 

이사온 일주일 동안은 정말 일생동안 둘이 꿈꾸어왔던 시간들이 꿈처럼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네시에 누가 문을 두드린다.

팔라메드 베르나르댕이란 이름을 가진 거대한 몸집의 남자, 말하자면 옆집에 사는 의사였다.

문을 열어주자 그 남자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나서는 거실로 들어와 안락의자에 앉는다.

그리고는 거의 말없이, 그 자가 하는 말은 묻는 말에 '그렇소' '아니오'이정도의 대답만 할 뿐이었다.

에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예의적인 것, 관습적인 것, 교양, 상식,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기서 블랙코미디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에밀은 그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 갖은 생각을 동원하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아무리

질문해도 오로지 두 대답, 또는 무시, 묵묵부답일 뿐이었던 것이다.

자신도 침묵하고 있으면 어쩐지 그 남자의 눈빛이 자기를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잠수부가 숨을 멈추는 시간을 연장하듯이 아무리 버티려해도 침묵이 신경을 자극한다.

다시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섯시면 그 남자는 일어서서 집으로 간다.

다음날, 그 다음날, 또 다음날도...

아침 눈을 뜨면 에밀은 뭔가 불안해지고 네시가 가까와질수록 알수없는 무게를 느끼게 된다.

 

하루는 의사에게 부인도 함께 와서 저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고

베르나르댕은 다음날 부인과 함께 저녁에 찾아온다.

부인은 남편보다 훨씬 거대한, 정말 여자였던 적이 있을까 상상할 수 없을 만치의 괴물스런 여자였다.

게다가 정신적인 장애마저 있는...

에밀은 팔라메르 베르다르댕에 대해서 연민을 느낀다. 그의 공허감, 세상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는 표정,

하물며 남을 귀찮게 하는 일조차 귀찮다는 듯한 태도....

 

에밀은 지금까지 자기가 상대해온 사람들과는 아무런 문제없이, 존경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껏 자기가 가져왔던 상식, 가치관과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것으로는 소통될 수 없는 벽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에밀은 자기 본능의 자아와, 길들여진 자아 두 개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어느날 불면증의 에밀은 밤에 발전기를 돌리는 소리같은 것을 듣는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보니 의사집 차고에서 나는 소리였다.

의사는 차에 시동을 건 채 죽어가고 있었다. 에밀은 경찰에 신고하고 부인에게 상황을 전하기 위해

그 집에 들어간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치의 더럽고 냄새나고 칙칙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정확히 맞는 시계 스물 다섯개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후 팔라메르는 돌아온다.

 

에밀은 생각한다.

자기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가치있는 거라고 배워왔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팔라메드가 시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에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축복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그에게 희망의 빛이라면 죽음이었던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살아 있을 이유, 그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밀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팔라메르의 집을 향한다.

차고의 유리를 깨고 집안으로 들어가 일흔 살의 뚱보 노인에 불과한 그남자의 침실로 올라간다.

그 의사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본다. 마치 에밀이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둘 다 말이 없다. 에밀은 연민 어린 심정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에밀은 일 년 후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냐고?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베르나르댕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느꼈어야 할 그런 일을 나는 아직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은 자신이 그 가치관에 맞는 범주에 속해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믿는 가치관과 다른 한 세계와 충돌하게 되면 나의 가치관 역시 내게 만들어진 것,

익숙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 난 또 다른 자아를 생성해내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나의 전부가 물론 아니다.

 

나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2009.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