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이장욱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살아갔다.
숲 속은 잃어버린 나무 같은 게 없는 곳인데
푸른 하늘과 검은 우주가
같은 곳인데
조금씩 다른 빗방울들이 떨어져서
나는 새로 산 우산을 펴 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우산과 같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모두 달랐다.
이 비 그치고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내가 바라보자
거기 어딘가의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그런 밤하늘이라고 중얼거렸다.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 이장욱 (문학과 지성사,2016)
*
시집을 읽지는 않고 가방 속에 넣고만 다니다가 우연히 펼쳐 만난 시,
그럴 때가 있다.
어느날 뭔가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올 때가.
그것은 한 줄의 문장일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이 시는 이상하게 내 가슴에 들어온다.
마치 자기의 빈의자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 처럼
어제는 아카시아 꽃을 만났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 나는 오월의 어느 도서관 창밖을 내다보던 나를 만난다.
잠에서 깨면 아침이듯이 나는 늘 그때 그곳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 향기가 좋아서 5월이면 그 도서관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데 생각만 했을 뿐 그곳을 가본 지 한참이 되었다.
꽃이 지기 전에는 가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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