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켜진 창
나희덕
불빛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문이 아닌 창 쪽으로 가서 집 안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큰아이는 장기를 두고 있고
접시에 남은 과일은 아직 물기 마르지 않았고
주전자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다
작은 아이는 자는가
나는 한마리 나방인 듯이
창문에 부대껴 서서 생각한다
그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섦에 대하여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의 아득함에 대하여
내가 없는 세상의 온기 또는 평화에 대하여
큰아이가 자꾸 시계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한마리 나방인 듯이
오늘은 창 밖 어둠 속에 나는 숨어서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불 켜진 버스처럼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그 창문을
-나희덕 시집『어두어진다는 것』/ (창비 200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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