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불 켜진 창 / 나희덕

kiku929 2018. 6. 10. 03:06






불 켜진 창




나희덕




불빛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문이 아닌 창 쪽으로 가서 집 안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큰아이는 장기를 두고 있고

접시에 남은 과일은 아직 물기 마르지 않았고

주전자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다

작은 아이는 자는가


나는 한마리 나방인 듯이

창문에 부대껴 서서 생각한다

그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섦에 대하여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의 아득함에 대하여

내가 없는 세상의 온기 또는 평화에 대하여


큰아이가 자꾸 시계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한마리 나방인 듯이

오늘은 창 밖 어둠 속에 나는 숨어서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불 켜진 버스처럼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그 창문을



-나희덕 시집『어두어진다는 것』/ (창비 200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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