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 이장욱

kiku929 2018. 5. 16. 14:47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이장욱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살아갔다.

숲 속은 잃어버린 나무 같은 게 없는 곳인데

푸른 하늘과 검은 우주가

같은 곳인데


조금씩 다른 빗방울들이 떨어져서

나는 새로 산 우산을 펴 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우산과 같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모두 달랐다.

이 비 그치고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내가 바라보자

거기 어딘가의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그런 밤하늘이라고 중얼거렸다.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 이장욱 (문학과 지성사,2016)







*


시집을 읽지는 않고 가방 속에 넣고만 다니다가 우연히 펼쳐 만난 시,

그럴 때가 있다.

어느날 뭔가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올 때가.

그것은 한 줄의 문장일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이 시는 이상하게 내 가슴에 들어온다.

마치 자기의 빈의자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 처럼


어제는 아카시아 꽃을 만났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면 나는 오월의 어느 도서관 창밖을 내다보던 나를 만난다.

잠에서 깨면 아침이듯이 나는 늘 그때 그곳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 향기가 좋아서 5월이면 그 도서관을 떠올리게 되는.

그런데 생각만 했을 뿐 그곳을 가본 지 한참이 되었다.

꽃이 지기 전에는 가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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