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긍긍 / 정끝별 전전긍긍 정끝별 수수털 위에서 단잠을 자고 막 일어난 배추흰나비 하얀 아욱꽃에 막 앉으려는 배추흰나비 노란 배추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배추흰나비 위에 사뿐히 올라 앉아 있는 배추흰나비 흰 앵두나무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배추흰나비 노란 유채꽃을 막 떠나려는 배추흰나비 나비 날아다.. !시 2010.09.15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우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 !시 2010.08.31
질투 / 김종미 질투 김종미 도로 위에서 먹이를 찾는 비둘기에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할 때 유리창 앞을 아스아슬하게 날아오르는 작은 그것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우리는 둘 다 살아서 결과는 무승부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진 것이다 나는 오래 너를 기억할 것이고 너는 즉시 나를 잊을 것.. !시 2010.08.15
귀뚜라미 / 나희덕 귀뚜라미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 !시 2010.08.13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 !시 2010.08.12
그냥이라는 말/ 조동례 그냥이라는 말 조동례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별 변화없이 그 모양 그대로라는 뜻 마음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난처할때 그냥 했어요 라고 하면 다 포함하는 말 사람으로 치면 변명하지 않고 허풍 떨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사람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자유다 속박이다 경계를 지우.. !시 2010.08.06
농담/ 유하 농담 유하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인생이었지만 이 순간,그대 재스민 향기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데 이건 진실이에요 인터넷 쇼.. !시 2010.08.04
내 속의 여자들 / 나희덕 내 속의 여자들 나 희 덕 내 속에는 반만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와 잎끝이 뾰족뾰족한 오엽송, 잎을 잔뜩 오그린 모란 두어 그루, 꽃을 일찍 피워 버려 이제 하릴없이 무성해진 라일락, 이런 여자들 몇이 산다 한 뙈기 땅에 마음을 붙이고부터는 그녀들이 뿌리 내려 내 영혼의 발목도 잡아 주기를, 어디.. !시 2010.08.03
사랑의 시차 / 최영미 사랑의 시차 최영미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 !시 2010.07.31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 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시 2010.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