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詩篇 / 조정권 고요 詩篇 조정권 1 누가 이 안을 쓸고 또 쓸었을까. 눌러 앉히고 싶어 이 고요 닫아건다. 2 안을 담아 밖으로 내놓는다. 안을 열고 활짝 대한다. 안도 시끄럽다. 3 안을 열어 두고 이 고요 잠근다. 밖이 가득하다. 비 오는 밤, 빗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었다. 빗소리가 내 안 가득히 스며든다. 왁.. !시 2010.06.12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 !시 2010.06.05
어제 / 박정대 어제 박정대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 !시 2010.06.03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 권현형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권현형 나환자 마을이었다가 전쟁으로 불타버려 다시 들어섰다는 마을, 당신이 사는 그곳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였지요 나병을 앓고 있는 젊은 사내로 슬픈 전설의 후예로 나무 잎새들 당신의 머리카락 햇결처럼 물이랑 일던 초여름이었지요 꽃잎.. !시 2010.05.30
비단강 / 나태주 개심사에서... 비단강 나태주 비단강이 비단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니다. 백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년을 가는 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 !시 2010.05.28
우리 시대의 순수시 / 오규원 우리 시대의 순수시 오규원 1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광화문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문화사적으로 본다.. !시 2010.05.25
걸림돌 / 공광규 걸림돌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 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 !시 2010.05.19
5월의 숲 / 복효근 5월의 숲 복효근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내가 저이들과 바람이 나더라도 바람이 나서 한 사나흘 떠돌더라도 저 눈빛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내 생의 앞뒤를 다 섞어버리더라도 용서해다오 세상에 지고도 돌아와 오히려 당당하게 누워 아늑할 수 있는 그늘이 이렇게 예비 되어 있었나니 그대보다.. !시 2010.05.14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 !시 2010.05.12
외도 / 박완호 외도 박완호 그리움의 거처는 언제나 바깥이다 너에게 쓴 편지는 섬 둘레를 돌다 지워지는 파도처럼 그리로 가 닿지 못한다 저마다 한 줌씩의 글자를 몰고 날아드는 갈매기들, 문장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바깥을 떠돌다 지워지는 저녁, 문득 나도 누군가의 섬일 성싶다 뫼비우스의 길을 간다 네게 가닿.. !시 2010.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