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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어지기

다치고나서 의도치 않게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70일이 지난 지금은 통증도 어느정도 가라앉고 통깁스에서 보조기로 바꾼 탓에 쉴 때는 마음대로 벗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비로소 쉰다는 기분이 이제야 든다. (아직도 다리를 내리면 순식간에 붓고 검붉은 색으로 변하면서 찌릿찌릿하다.) 몸이 하루하루 굳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무리 침대에서 운동을 한다고 해도 걷지를 못하니 한쪽다리는 이미 근육이 다 빠져버리고 전체적으로 뻣뻣하다. 한쪽다리로 겨우 서서 잠깜잠깐 씻고 설거지하고, 10분을 일하면 30분을 거상하며 누워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옥에서 막 탈출하여 나온 사람처럼 평온하고 행복하다. 책을 읽다가 '무디다'는 단어에서 멈추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마음이 ..

바람마음 2022.12.23

해탈이란

"해탈이란 자신을 얽어매는 관념의 족쇄에서 벗어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인간의 고통과 불안에 싸인 자신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장대 높이 뛰기하듯 뛰어넘어 저편, 피안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념이란 그 고통을 주는 것, 불안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집착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다시 읽어본다. "시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관념의 족쇄를 풀어주어 언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바람마음 2022.12.23

저녁별/사포

저녁별 사포 저녁별은 찬란한 아침이 여기저기에다 흩뜨려놓은 것을 모두 제 자리로 돌려보낸다. 양을 돌려보내고 염소를 돌려보내고 어린이를 그 어머니 손에 돌려보낸다 * 간결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하고 있는 시인가. 마지막 연, '어린이를 그 어머니 손에 돌려보낸다'는 이 문장은 제자리,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삶과 죽음까지도 의미하고 있으니 그 의미망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시 2022.11.28

김국진 TV 유튜브 거침없는 골프

요즘 즐겨 보는 유튜브가 바로 김국진의 '거침없는 골프'다. 난 골프를 칠 줄도 골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스포츠는 관전하는 스포츠였다. 축구 경기를 보고 골프 경기를 보고 탁구 경기를 보고... 그런데 이 프로는 김국진과 게스트, -물론 게스트들이 최고 수준의 골퍼들이다-가 골프를 치며 나누는 대화를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얼예능프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끄럽고 작위적이고 웃음의 포인트를 잡아 편집하는 것과는 다른 처음부터 끝까지 골프에 대한 이야기다. 그 대화가 상대를 배려하고 겸손하게 응원해주는 말이어서 실수를 하면 뒷바람이 너무 셌죠?, 오른쪽을 의식했죠? 라든가 가끔씩 기가막히게..

바람마음 2022.11.26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 문태준

병원에 입원중이다. 세상이 좋아진 것은 병원에서도 택배로 필요한 물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세 권 주문했다. 《밤은 책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김종삼 시선》 이번에 주문한 세 권의 책은 모두 마음에 든다. 사랑스러운 아가가 빨리 자라는 것이 아깝다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아끼며 읽고 싶은 책이다. 요즘은 문태준 시인에게 빠져서 지낸다. 제주도로 거주를 옮겼고 그곳에서 귤농사와 카페를 하고 계시다고 한다. 제주도에 가면 꼭 그 카페에 들르리라 다짐한다. 처음부터 문태준 시인은 좋아했지만 지금 좋아하는 것은 그때와 다르다. 그 언어 하나 하나, 한글이 이토록 아름답고 서정적일 수가 있구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문장들을 손으로 쓰다듬게 된다. 문태준 시인의 글은 한 ..

2022.11.25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앉아 있는 사슴 불을 꺼도 사라지지 않는 사슴 긴 속눈썹이 젖어 흔들리는 사슴 눈 내리는 꿈을 지나서 사슴은 온다 저녁 하늘의 방향으로 수많은 사슴이 뛰어간다 사슴의 이마 위로 폭설이 쏟아진다 견딜 수 없이 사슴 저녁처럼 가만히 오는 사슴 까마득히 등이 멀어지는 사슴 희박한 사슴 돌아보면 손등에는 없는 사슴 아홉의 달빛이 박힌 사슴 무성하던 잎들이 숲을 빠져나갈 때 어지러운 사슴 찬 얼룩의 모양으로 외로움으로 사슴은 태어나지 약속에 늦지 않도록 깊어진다는 말이 더 깊어지도록 사슴이라는 말이 더 사슴이 되도록 이마 위로 뛰어드는 사슴을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지 차분히 사슴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결연하게 사슴으로 달려 나가지 손등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시인수첩》 202..

!시 2022.10.26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중에서

오월 문태준 상수리나무 새잎이 산의 실내(室內)에 가득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월가 소년과 바람이 있었다 왜가리가 무논에 흰 빛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파밭에는 매운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유월 문태준 사슴의 귀가 앞뒤로 한번 움직이듯이 오동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푸르고 넓적한 손바닥 같은 작은 언덕에 올라선 시간은 늦가을비 문태준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새와 물결 문태준 새는 물결을 잘 아네 새는 물결 위에 앉네 물결을 노래하네 오늘은 세개의 물결을 노래하네 물결은 하얗게 흔들리네 설백 (雪白) 문태준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

!시 2022.07.14

<아침은 생각한다> 外 2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문태준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을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開館)을 축하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문태준 그녀가 나를 바라보..

!시 2022.07.14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이 말의 공 ' 너를 사랑한다'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것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간다. 공이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면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 크리스티앙 보뱅 (이창실 옮김, 마음산책) 중에서 * 사랑의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똑같은지도 모른다. 연인이든 문학이든 자식이든 꽃이든... 사랑의 목적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그 자체- 쓰고 보니 노래의 가사다- 그리고 그 ..

!글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