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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를 보내며 / 박노해

경운기를 보내며 박노해 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끓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 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 *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된 시다. 사물과 감정을 나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겠지만 정을 계속 주다보면 어느순간부터는..

!시 2022.04.08

드라마, 영화, 책

드라마를 보며 보낸 시간이 한달여 되어간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내가 넷플릭스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의 불시착', '디어 마이 프렌즈', 그리고 '스물다섯 스물하나', '미스터 선샤인'... 참 이상한 것이 좀처럼 드라마에는 몰입이 되지 않았던 내가 이번은 꽤 재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달이 되어가니 흥미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눈과 귀라는 감각을 써야 해서인지 마치 한적한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한동안 도시의 문명에 신기해하고 들뜨다가 어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고적한 시골이 그리워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뭔가 피로를 느끼게 되면서 책을 읽는 편안함이 그리웠다. 그동안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모처럼 몰입할 수 있었던 시간이고, 그러나 이제 다시 작별을 고한다. 당분간, 안녕!

바람마음 2022.03.28

말과 행동, 믿어야 하는 것은...

요즘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됨을 알아볼 때, 그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행동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 이해되지 않고 혼란스러울 때는 상대가 하는 말을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행동을 진실이라고 믿으면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퍼즐이 맞춰지듯 일사분란하게 순식간에 모든 정황이 설명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좋은 말, 멋진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 멋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그 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선 결코 안 된다는 것. 내가 믿는 말이 있다. 집안의 하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만인에게 존경받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것. 사람은 가까이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얼굴..

단상 2022.03.25

봄비 내리는 한밤중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살갗에 느껴지는 바람이 포근하여 주변을 걷다가 들어왔다. 오늘은 미니 장미를 심었다. 꽃을 사지 않으려고 했는데 꽃 앞에서는 나의 그런 다짐은 쉽게 무너진다. 집에돌아와 냉장고정리를 하며 강신주 철학자의 강의를 들었다. 어디가 아프신지 많이 야위어서 안타까웠다. 오래전에 이분의 책은 거의 다 읽었을만큼 좋아했다. 하루하루가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조금씩 조금씩.. 역시 나는 내가 한동안 내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만큼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 기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아직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봄비... 이렇게 또 봄이 오는구나.

단상 2022.03.18

후리지아 튤립 진달래

지금 우리 카페 앞의 꽃들. 후리지아는 겨울에 구근을 심으면 이른봄 꽃을 피운다. 후리지아를 심고부터 봄은 후리지아에서 오기 시작한다. 진달래는 2년전 부모님 산소에서 캐와 심은 것.. 꽃이 필 때마다 부모님의 안부를 듣는 것 같다.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며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하고 대답해준다. 튤립이 여리여리하게 피었다. 후리지아 한 모퉁이에서^^ 반가워!!

내작은뜰 2022.03.17

우리집

어젯밤 비가 내렸는데도 날씨가 포근하다. 후리지아가 피어나는 화분들을 밖에 내놓았다. 사람들이 지나다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 가게 앞의 길목에서 우리 가게가 꽃으로 가장 환하다. 요즘은 마음이 평화롭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내가 살고 있던 주변을 처음 둘러보는 사람처럼 바라보게 된다. 거실도 부엌도 침대도 그리고 창밖의 경치도... 이곳에 이사를 온지 이제 8개월... 나는 지금 집이 마음에 든다. 개발지역이라 외지고 낙후된 곳이지만 한적해서 좋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좋다. 30년 넘게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서만 살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병원도 은행도 마트도 집 앞에 없다는 것이 적응이 안 되었지만 이제는 점점 편리해져간다. 우리 아파트 바로 옆, 그러니까 경계선에 ..

단상 2022.03.13

꽃씨를 뿌리고

작년에 집 근처를 산책하면서 모아놓은 코스모스를 화분에 뿌렸다. 그리고 풍선초, 백일홍, 나팔꽃 씨도 심었다. 꽃씨를 심는 것은 미래의 행복을 미리 심어두는 일, 그처럼 확실한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얼까.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다림. 아아, 인간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p119 꽃씨를 심은 일은 1퍼센트의 행복을 위해 99퍼센트를 기다리겠다는 다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나날이 좋은 날을 위한 것이기에 기다리는 99퍼센트도 ..

단상 202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