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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투명도서관 / 한용국

시립투명도서관 한용국 책이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기린- 얼굴이 옆에서 끄덕거렸다 양 - 어깨가 한 걸음씩 멀어졌다 창밖에는 흐름이 조용히 떠 있었다 햇살이 서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모두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다만 기억하면 돼 낡은 의자가 품고 있는 발자국 냄새들을 십년 쯤 늙어버린 너구리 - 손이 다가왔다 시간은 사실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냥 웃는 거지 책이 살짝 기울어졌다 -《시와사상》 (2021 봄호) 중에서 * 이런 느낌의 시를 좋아한다.

!시 2021.09.17

그게 인간의 비극이자 위대함이야 / 최수철 '사랑의 다섯 가지 알레고리' 중에서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신에게도 싫증을 느끼는 게 인간이야. 대단하지 않아? 그건 인간이 변덕스러워서가 아니야. 인간은 사랑뿐만 아니라 고독도 간절히 원하는 거야. 그런 점에서 인간은 신보다 한 수 위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신은 고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 인간은 고독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하지. 그게 인간의 비극이자 위대함이야. ― 최수철 테마 연작소설집 『사랑의 다섯 가지 알레고리』, 「과도하게 친밀한 고독」 (문학과지성사, 2021) p291 * 문득, 고독할 수 있는 자유가 확보된 사랑만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

!글 2021.08.06

돌이 준 마음 / 이제니

돌이 준 마음 이제니 돌에게 마음을 준다. 빛나는 옷을 입힌다. 높다란 모자를 씌운다. 돌은 마음을 준 돌이고. 돌은 마음을 준 옷을 입고 있고, 돌은 마음을 입은 모자를 쓰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돌에게 마음을 쓴다. 살지 않는 돌에 제 말을 건넨다. 마음을 쓰고 쓰면서 마음을 두드리고 두드린다. 살아가라고. 사라지지 말고 살아가라고, 두드리고 두드리면 들려오는 것, 들려오고 들려오면서 날아가는 것. 여리고 여린 돌의 가루.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날의 고운 뼛가루. 날리고 날려서 들판으로 날아간다. 날아가고 날아가서 바닷길에 닿는다. 한줌 쥐어보는 돌의 마음.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돌의 시간. 길목과 길목에는 손길이 닿은 돌이 놓여 있다. 빛나고 높다란 것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사랑하는 표정이 줄..

!시 2021.02.08

하늘 베틀의 노래

하늘 베틀의 노래 오 어머니 대지여, 오 아버지 하늘이여, 저희는 당신의 자식들이옵니다. 당신 좋아하시는 선물을 등에 지고 당신께 가져오나이다. 하오니 저희에게 빛나는 한벌의 옷 짜 주소서 날실은 아침의 흰빛으로 해 주시고, 씨실은 저녁의 붉은 빛으로 해 주시고, 술장식은 떨어지는 빗줄기로 해 주시고, 가장자리는 서 있는 무지개로 해 주소서, 그렇게 저희에게 빛나는 한벌의 옷 짜 주소서, 저희가 새들 노래하는 숲을 어울리게 걸을 수 있도록 저희가 푸른 풀밭을 어울리게 걸을 수 있도록 오 어머니 대지여, 아버지 하늘이여 -테와족 노래- 아메리카 인디언의 노래 /송 무 譯

카테고리 없음 2021.01.15

토요일...

영하 10도를 오가는 날이 이어진다. 바닥 난방과 공기 난방을 계속 돌리면서 마음이 편치않다. 요즘은 문을 닫는 것이 경제적으로 낫기 때문이다. 퇴근할때 마다 날이 추운 며칠만이라도 쉬고 집안일과 메뉴 점검을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아침이면 다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손님이 오시면 내가 문을 닫았더라면 문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을텐데 하는 생각에 마감시간까지 지키게 되는 것이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고 또 나로인해 이 세상에 뿌려진 것에 대해서... 그것은 아이들과 내가 쓴 몇편의 시들과 그리고 살면서 지게 되는 빚과 이 가게... 그래서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짐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야할 이유고 희망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뿌린 것을 잘 가꾸고 내 손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

바람마음 2021.01.09

눈, 내린다

눈 내린다. 내가 좋아하는 언덕 위에도... 눈 맞는 언덕은 여전히 침묵하고 나는 저 침묵을 사랑한다. 보도블럭에 쌓인 눈을 쓸었다. 늦은 손님에게 음료를 내어드리며 마지막 손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첫 손님은 너무나 명확한데 마지막 손님은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나서야 알게 된다. 이렇게 지나고나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바람마음 2021.01.06

과거 / 임승유

과거 임승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 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 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 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 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 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 문학과지성사, 2020) * 창문으로 항상 언덕이 보이는 이곳, 하루 대부분을..

!시 2020.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