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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나태주

시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푸른길, 2016) * 이 시가 발표된 지는 20년도 더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이 시는 제게 이 세상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쳐주었지요. 너의 행위 하나, 네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은 적어도 n분의 1만큼 영향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요. 어제처럼 오늘 아침도 가게 앞을 쓸었습니다. 그만큼 오늘의 지구도 깨끗해졌겠지요.

!시 2022.01.27

수형전(手形轉) / 김경주

수형전(手形轉) 김경주 벽으로 손이 가고 있다 손에서 새가 흘러나온다 손은 어둠 속에서 고도를 갖는다 손에서 우리가 눈을 뜨면 우리는 새벽에 한 쌍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비밀이 많은 깃털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벽 속의 새처럼 새 속에서 나는 파득거린다 오늘는 내 손가락 끝에 앉아 있는 새를 너라고 부른다 시는 내 손가락 끝의 해발에 앉아 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다른 쌍을 찾는 새처럼 어둠 속에서 해발을 못 느끼는 한 쌍의 손 한 손은 새가 되어 네 얼굴을 덮고 싶다 나를 만졌던 네 손을 숨기고 싶다 너는 어떤 인간인가 눈을 감고 내가 내려앉는 들에서 ―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중에서

!시 2022.01.24

2121년 마지막 달의 첫날

어찌어찌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이 이 정도일 줄이야. 우리 가게 앞 도로의 길이가 400미터 정도 되는데 카페가 네 군데다. 올해 두 군데가 생긴 것이다. 백미터에 하나씩이라니. 더구나 상권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정도의 역할 정도가 전부인 이곳에 나눠먹을 것도 없음에도 자꾸만 생긴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큰딸이 해준 말이 있다. 영원한 단골은 없다고... 그 말을 늘 염두에 둔다. 그래서 단골이 오다 안 온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 오지 않다가 다시 온다고 해도 역시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오늘 찾아준 손님이 중요할 뿐이니까. 그러나 찐단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몇있다. 뭐랄까, 의리로 오는 손님들이다. 그렇다고 또 특별하게 내색..

단상 2021.12.01

구리 / 안현미

구리 안현미 누군가 정성으로 아니 무심으로 가꿔놓은 파밭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파 한단을 다듬는 동안 그동안만큼이라도 내 생의 행빛이 남아 있다면, 그 햇빛을 함께해줄 사람이 있다면,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일쯤은 일도 아닐까 무심으로 무심으로 파 한단을 다듬을 동안 망우리 지나 딸기원 지나 누군가 무심으로 아니 정성으로 가꿔놓은 파밭 지나 구리 지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하얗게 하얗게 파꽃이 피는 동안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동안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중에서

!시 2021.11.15

시간들 / 안현미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

!시 2021.11.12

안개사용법 / 안현미

안개사용법 안현미 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

!시 2021.11.12

21년 11월 11일

날이 차가워졌다. 어제부터 내의를 꺼내입었다. 내의를 입는다는것은 곧 겨울이라는 뜻. 날이 추워지면 돌아보기에 좋은 시간이 온다. 앞을 보고만 가도 세계 속의 일원으로 살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돌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갈 힘을 얻게 된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겸손해지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헛된 욕망들을 거를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일어나는 이 욕망이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잘 산다'는 의미는 '사이가 좋다'는 의미와 같다고 한다. 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 관계, 특히 가까운 사이가 좋다는 것이 어느만큼 삶의 질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말해주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잘 살고 있..

단상 2021.11.11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에서

1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2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비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는 알았네 3 이젠 모두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 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일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후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2021.10.29

해파리 섬 / 여한솔

해파리 섬 여한솔 손을 담그면 돌 같은 것이 만져진다. 단단한 미래가 부서진 일이다. 해풍에 빌려나온 기체가 다시 새나 언덕으로 들어가 흐른다. 뻐를 바른다. 가시나무가 자란다. 바다의 밑바닥 맨 아래 유리컵의 둥근 밑동을 본다. 물에 번진 피와 해양생물의 닮은꼴 휘감는 것들은 은은하다 꿈의 물질처럼 아름다운 테두리를 떠올린다. 첨벙 뛰어든 소리 오래된 섬에 오래된 할머니가 있다. 능선을 따라 흰 새가 울음을 떨어트린다. 조류가 바뀐다. 부드러운 독이 자라서 맑은 해파리, 해파리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돌을 지난다. 그때 나는 해변에 앉아 부서진 조개를 주웠다. 긁힌 바닥 얼음장 같은 믿음을 깨고 얼음장 같은 믿음 조각들이 찌르고 깨트려 찾는 무언가가 단단히 상처나는 동안 곡선은 빈자리를 채운다. 바다 위에..

!시 2021.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