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얀 / 임솔야

kiku929 2018. 1. 9. 22:46



하얀 




임솔야




불을 끄니

불을 켜고 있을 때의 내 생각을 누군가

훤히 읽기 시작한다.


낮에 만난 이야기들은 햇빛에 닿아

타버렸다.


베란다의 토끼는

귀가 커다랬고 털이 하얬고 나날이 

뚱뚱해졌다.


내가 없는 한낮에

벽지를 뜯고 책상을 갉고 내 운동화를 핥더니

어느 날 죽어버렸다.


입술을 뜯어 먹다가 내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빨아 먹었는데 왜 그랬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살인자는

대답한다. 나는 다른 죽음을 향해

채널을 바꾼다.


불꺼진 방에

앉아 있다. 아픈 사람처럼 누군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토끼를 씻어주었던 날 토끼는 죽었다. 나는 두 손으로

누군가의 까만 그림자를 씻는다.

기억나지 않던 것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고

살인자가 대답한다.


불을 켜니

불을 끄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했던 생각을

이어서 하게 되고


우리 건물이 

흰 안개에 싸여 있다는 걸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 지성사, 201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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