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5
-설산 너머
장석주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잘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한 말과
여래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里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장석주 시집 『몽해항로』중에서 ( 민음사, 2010)
*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내가 자주 가는 절 중에 부여에 있는 '무량사'라는 절이 있다.
일주문을 통과해서 천왕문까지의 거리가 짧은 것이 좀 아쉽지만, 그 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소박하면서도 정갈하고 시간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어 마음에 안식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극락전이다.
액자 속의 풍경처럼 석등과 오층 석탑과 극락전이 한 가운데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어두운 문 저 너머에 펼쳐지는 탁 트인 눈부신 공간, 그리고 거기에 우뚝 서 있는 절의 모습은
그 순간 홀연히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야말로 극락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필경 저런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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