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걱정 / 기형도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 !시 2010.01.09
빈 집 / 기형도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기형도의 시중에서 가.. !시 2010.01.09
옛이야기 같은/ 김미선 옛이야기 같은 김미선 아버지 떠나고 그 이듬해 봄이던가, 장대비가 몇 날 며칠 내리고 꽃도 빗물 속에 피었다 져버리고 꽃잎 따라 흘리던 붉은 눈물 꽃져가는 세월이여, 따르지 못한 아픔이여 빗물인지 꽃물인지 범벅으로 흘러내리던 꽃의 세월은 왜 그리도 짧은 것인가 꽃은 지고 못 잊을 사람만 어.. !시 2010.01.09
가을의 소원 / 안도현 가을의 소원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이 가을엔 꿈꾸지 않게 하소서.. 아무것도, 어떤것도 돌아보.. !시 2010.01.09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 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 !시 2010.01.09
수련 -뿌리에게 / 이승희 수련 -뿌리에게 이승희 당신을 수면 아래 묻고 당신의 이름은 물속의 흙에 묻었습니다. 나는 물 위에 떠서 가만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여전히 한 몸인 당신의 이야기가 오늘 하루의 양식입니다. 난 여전히 당신을 읽고 당신은 여전히 나를 읽습니다. 때로 당신은 자꾸만 나를 밀어 올리려 하지만 난 결.. !시 2010.01.09
기별 / 권애숙 기별 권애숙 참 오래 걸려 여자의 코트가 당도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코트가 돌아오는 동안 여자의 집엔 진눈깨비가 추적거렸고 앵두꽃이 터졌고 태풍 '우쿵'이 쿵쿵거리다 갔다 -너무 오래 찾아가지 않아서…… 세탁소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물었고 부재를 메우듯 허둥거리던 나는 천천히 천 원짜리 .. !시 2010.01.09
저무는 풍경 / 박이화 저무는 풍경 박이화 돌아오지 않는 강물을 기다리는 다리는 차라리 무너지고 싶을 거다 무너져선 안 되는 것들이 기실은 더 무너지고 싶은 이 기막힌 역설로 나는 그대에게 기울고 강물은 또 그렇게 범람했나보다 허나, 나도 다리도 끝내 무너질 수 없는 것은 내 그리움의 하중이 견딜만 해서가 아니.. !시 2010.01.09
아름다운 마음은 늦어진다 / 김현수 나의 유년시절의 표상에는 바다, 분꽃, 혼자인 나, 엄마, 그리고 기차역이 있다. 주말이면 6형제의 막내였던 나는 모두 외지로 나간 형제들을 마중나가는 일이 이벤트처럼 기다리는 일이었다. 오기전의 기다림과 설렘, 떠난 후의 적막과 쓸쓸함... 그 빈 공간의 느낌은 지금도 애잔하게 언제나 나의 언.. !시 2010.01.09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 여림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울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 떼의 눈발을 이끌.. !시 201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