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긴 저녁 / 장석남 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난蘭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돌돌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 !시 2010.01.09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왔다 가는 것.. !시 2010.01.09
나무 / 이성선 나무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 !시 2010.01.09
거울 속의 나 / 이생진 거울 속의 나 이생진 어느 쪽이 더 오래 머물러 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만 같은 자리에 있고 싶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보면 조금씩 동정이 가듯 저 사람도 이 사람을 보면 조금씩 슬퍼져서 한 번만 합쳐서 살고 싶다 얕은 저 사람의 부피에 살면 좁은 자리가 모두 공간으로 뚫리고 텅 빈 저 사람의 공간.. !시 2010.01.09
당나귀 여린 발자국으로 걸어간 흙밤 /박정대 내 고독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사랑이 왔네 사랑은 고통처럼 깊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봄밤은 좀처럼 마당가에 있는 꽃봉오리에게로 가지 못하네 나는 습관처럼 또 담배를 피워 물고 지금 다시 사랑은 치명적으로 덜컹거리네, 밤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 가수들은 밤새 파두를 부.. !시 2010.01.09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안 도 현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 !시 2010.01.09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베를레느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베를레느 내 가슴에 조용히 비가 내리네 마을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속에 스며드는 이 우울함은 무엇인가.. 땅과 지붕위에 내리는 부드러운 빗소리여 우울한 가슴에 울리는 오 비의 노래여 병든 이 가슴에 공연히 비가 내리네 오 뭐라고, 배반이 아니라고 이 슬픔은 이유가 없네.. !시 2010.01.09
칼과 그림자 / 박이화 칼과 그림자* 박이화 춤을 추다보면 음악이 눈으로 보이는 때가 있다 그야말로 온 몸으로 리듬을 타게 되는 내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춤을 추는 그런 순간이 있다 어떤 노검객은 눈이 침침해지자 상대가 보이더라 했다 마음을 비우니 칼이 보이더라 했다 더 이상 칼을 뽑지 않고도 이길 수 있.. !시 2010.01.09
엽낭게의 내밀한 살림 / 장석주 엽낭게의 내밀한 살림 장 석주 엽낭게가 꾸리는 살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바다 속으로 빠지는 해, 붉은빛을 목도리처럼 휘감은 회색 구름, 남도 내륙의 산들이 엽낭게의 조촐한 살림 내역이다. 그 살림에 비추어 내밀한 것의 규모를 나 혼자 짐작해 보는데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이 왈칵, .. !시 2010.01.09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 !시 201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