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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다시 내리고

얼마전 인터넷에서 구매한 책이 도착했다. 모두 세 권이었는데 한 권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한 권은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이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글을 잘 쓰는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잘 쓰려고 한 문장들이 곳곳에서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 책은 자신의 특별한 직업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해주는)을 통한 특별한 경험을 쓴 글이었는데 그토록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들이 정말 필요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주었다. 필요이상의 치장처럼, 아니면 필요이상의 과시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그런 묘사들이 작가가 그 책을 내려고 다짐한 그 어떤 목적 -분명 목적이 있는 책이었으므로- 을 위한 것이었나는 두고두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 권은 김애란의「바깥은 여름」이란 책이..

바람마음 2020.11.19

녹두 / 강영은

녹두 강영은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 녹두라는 말이 좋았다 녹두밭 한 뙈기가 헐어있는 입속을 경작했던 것인데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 녹두꽃 지는 거기가 저승이어서 녹두는 보이지 않았다, 녹두가 너무 많은 곳 녹두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나는 어떻게 인간이 되나 녹두를 생각하는 동안 초록이나 연두가 희망을 쏟아냈지만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여물지 않은 입안에 가시가 돋고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혓바닥을 찔렀다 눈을 뜨면 젊은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나는 진정 아픈 빛깔에 시중들고 싶었다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었다 오..

!시 2020.11.19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이병률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이병률 원하지 않는 일에도 윤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신이..

!시 2020.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