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앉아 있는 사슴 불을 꺼도 사라지지 않는 사슴 긴 속눈썹이 젖어 흔들리는 사슴 눈 내리는 꿈을 지나서 사슴은 온다 저녁 하늘의 방향으로 수많은 사슴이 뛰어간다 사슴의 이마 위로 폭설이 쏟아진다 견딜 수 없이 사슴 저녁처럼 가만히 오는 사슴 까마득히 등이 멀어지는 사슴 희박한 사슴 돌아보면 손등에는 없는 사슴 아홉의 달빛이 박힌 사슴 무성하던 잎들이 숲을 빠져나갈 때 어지러운 사슴 찬 얼룩의 모양으로 외로움으로 사슴은 태어나지 약속에 늦지 않도록 깊어진다는 말이 더 깊어지도록 사슴이라는 말이 더 사슴이 되도록 이마 위로 뛰어드는 사슴을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지 차분히 사슴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결연하게 사슴으로 달려 나가지 손등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시인수첩》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