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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앉아 있는 사슴 불을 꺼도 사라지지 않는 사슴 긴 속눈썹이 젖어 흔들리는 사슴 눈 내리는 꿈을 지나서 사슴은 온다 저녁 하늘의 방향으로 수많은 사슴이 뛰어간다 사슴의 이마 위로 폭설이 쏟아진다 견딜 수 없이 사슴 저녁처럼 가만히 오는 사슴 까마득히 등이 멀어지는 사슴 희박한 사슴 돌아보면 손등에는 없는 사슴 아홉의 달빛이 박힌 사슴 무성하던 잎들이 숲을 빠져나갈 때 어지러운 사슴 찬 얼룩의 모양으로 외로움으로 사슴은 태어나지 약속에 늦지 않도록 깊어진다는 말이 더 깊어지도록 사슴이라는 말이 더 사슴이 되도록 이마 위로 뛰어드는 사슴을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지 차분히 사슴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결연하게 사슴으로 달려 나가지 손등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시인수첩》 202..

!시 2022.10.26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중에서

오월 문태준 상수리나무 새잎이 산의 실내(室內)에 가득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월가 소년과 바람이 있었다 왜가리가 무논에 흰 빛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파밭에는 매운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유월 문태준 사슴의 귀가 앞뒤로 한번 움직이듯이 오동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푸르고 넓적한 손바닥 같은 작은 언덕에 올라선 시간은 늦가을비 문태준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새와 물결 문태준 새는 물결을 잘 아네 새는 물결 위에 앉네 물결을 노래하네 오늘은 세개의 물결을 노래하네 물결은 하얗게 흔들리네 설백 (雪白) 문태준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

!시 202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