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가들을 위하여 삽화가들을 위하여 이설빈 모퉁이 붐비던 눈길 속으로 너무 오래 접혀 있던 빛이 스러졌다 이제는 밤보다 먼저 당신의 눈꺼풀을 끌어 덮는다 얼음이 물에 녹아내리며 더 차갑고 더 쓰라린 물결에 휘감기듯이 뜬눈으로 잠든 일술과 여린말을 섞으며 나는 그 꿈에 동반한다 접붙인 뿌리로.. !시 2018.08.02
회복이라는 말 / 이현승 회복이라는 말 이현승 병실에서 시간은 느리게 간다. 풍경 발명가들은 하릴없이 창밖에나 눈을 준다. 그가 해시계 발명가로 업종을 바꿀 즈음 창밖 오후의 해가 나무의 그림자를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옮기는 것이 보인다. 회복 병실은 고요하다. 그래서 자꾸 수액 떨어지는 것에 눈을 주.. !시 2018.08.02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덮어준다는 것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 !시 2018.07.21
한 종지의 소금을 대하고서는 외 6편 /문태준 한 종지의 소금을 대하고서는 문태준 그릇에 소금이 반짝이고 있다 추운 겨울 아침에 목전目前에 시퍼렇게 흰 빛이 내 오목한 그릇에 소복하게 쌓였으니 밤새 앓고 난 후에 말간 죽을 받은 때처럼 마음속에 새로이 생겨나는 시詩를 되뇌듯이 박토薄土에 뾰족이 돋은 마늘 촉을 보듯이 -.. !시 2018.07.20
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내 워크맨 속 갠지스 김경주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대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 !시 2018.07.20
긴 손가락의 詩 / 진은영 긴 손가락의 詩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 !시 2018.07.20
새벽 종소리 / 백무산 새벽 종소리 백무산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배경으로부터 도려내어진다 누가 나를 깨울 때 나는 어둠으로부터 발라내어진다 찢어내지 않고 깨우는 소리 발라내지 않고 깨우는 소리 허공 다치지 않게 나는 새들 소리 !시 2018.07.20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이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천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 !시 2018.06.27
샌드위치맨 / 신철규 샌드위치맨 신철규 그는 무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다 그는 좀 더 투명해져야만 한다 그는 처음에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을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변장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입술을 지운다 그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말과 말 사이.. !시 2018.06.26
소 / 김광규 소 김광규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를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 !시 2018.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