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04

시립투명도서관 / 한용국

시립투명도서관 한용국 책이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기린- 얼굴이 옆에서 끄덕거렸다 양 - 어깨가 한 걸음씩 멀어졌다 창밖에는 흐름이 조용히 떠 있었다 햇살이 서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모두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다만 기억하면 돼 낡은 의자가 품고 있는 발자국 냄새들을 십년 쯤 늙어버린 너구리 - 손이 다가왔다 시간은 사실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냥 웃는 거지 책이 살짝 기울어졌다 -《시와사상》 (2021 봄호) 중에서 * 이런 느낌의 시를 좋아한다.

!시 2021.09.17

돌이 준 마음 / 이제니

돌이 준 마음 이제니 돌에게 마음을 준다. 빛나는 옷을 입힌다. 높다란 모자를 씌운다. 돌은 마음을 준 돌이고. 돌은 마음을 준 옷을 입고 있고, 돌은 마음을 입은 모자를 쓰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돌에게 마음을 쓴다. 살지 않는 돌에 제 말을 건넨다. 마음을 쓰고 쓰면서 마음을 두드리고 두드린다. 살아가라고. 사라지지 말고 살아가라고, 두드리고 두드리면 들려오는 것, 들려오고 들려오면서 날아가는 것. 여리고 여린 돌의 가루.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날의 고운 뼛가루. 날리고 날려서 들판으로 날아간다. 날아가고 날아가서 바닷길에 닿는다. 한줌 쥐어보는 돌의 마음.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돌의 시간. 길목과 길목에는 손길이 닿은 돌이 놓여 있다. 빛나고 높다란 것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사랑하는 표정이 줄..

!시 2021.02.08

과거 / 임승유

과거 임승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 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 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 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 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 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 문학과지성사, 2020) * 창문으로 항상 언덕이 보이는 이곳, 하루 대부분을..

!시 2020.12.26

녹두 / 강영은

녹두 강영은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 녹두라는 말이 좋았다 녹두밭 한 뙈기가 헐어있는 입속을 경작했던 것인데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 녹두꽃 지는 거기가 저승이어서 녹두는 보이지 않았다, 녹두가 너무 많은 곳 녹두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나는 어떻게 인간이 되나 녹두를 생각하는 동안 초록이나 연두가 희망을 쏟아냈지만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여물지 않은 입안에 가시가 돋고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혓바닥을 찔렀다 눈을 뜨면 젊은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나는 진정 아픈 빛깔에 시중들고 싶었다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었다 오..

!시 2020.11.19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이병률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이병률 원하지 않는 일에도 윤율은 있다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병에 걸린다면 노란색을 아무 색으로도 알지 못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픔에도 아름다움은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눈을 감아도 당신이 내 눈 속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이 돌아다니지 못한다면 어느 낯선 골목 안쪽 햇빛 아래에 쌓인 눈이 녹고 있다면 그런데도 많은 부분이 더 녹아야 한다면 눈의 주인이 애타게 눈을 기다리던 당신이라면 삶의 구석구석까지를 돌보는 일도 고단할 터인데 당신이 눈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눈을 편애하는 당신에게도 수고와 미안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좋은 당신 감정과 열정이 희미해진 당신 너무 바싹 말라 있거나 독이 올라 있는 몸 상태를 돌보느라 당신 사정이 더 참담해진다면 당신이..

!시 2020.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