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04

경운기를 보내며 / 박노해

경운기를 보내며 박노해 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끓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 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 *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된 시다. 사물과 감정을 나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겠지만 정을 계속 주다보면 어느순간부터는..

!시 2022.04.08

사선의 빛 / 허연

사선의 빛 허연 끊을 건 이제 연락밖에 없다. 비관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났던 문틈으로 삐져 들어왔던 그 사선의 빛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비추는 온정을 나는 찬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이 너무나 차가운 살기였다는 걸 알겠다. 이미 늦어버린 것들에게 문틈으로 삐져 들어온 빛은 살기다. 갈 데까지 간 것들에게 한 줄기 빛은 조소다 소음 울리며 사라지는 놓쳐버린 막차의 뒤태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허망한 조소다. 문득 이미 늦어버린 것들로 가득한 갈 데까지 간 그런 영화관에 가보고 싶었다. - 시집 (문학과지성사, 2012) * 시인이 한때 찬양했던 빛,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비춰주는 한 줄기 빛을 온정이라고 믿었던 그 빛. 그러나 늦어버렸다고 백기를 들어올린 순간에 비추..

!시 2022.02.16

출렁이는 창문 / 송종규

출렁이는 창문 송종규 젖은 창이 이루는 화폭 속으로 밤 열차가 지나간다 나는 종종 열차의 구석진 자리, 습하고 어두운 뒤 칸에 앉아있다 가지런히 손을 모아 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목들이, 절절하지도 않은 사건들이 유령처럼 창밖에 떠다닌다 한동안, 어떻게 세계가 확대되는지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함으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몰두한 적이 있다 사무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과 죽을 만치 절실하다면 어떤 연애도 신파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어떤 결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밤 열차의 뒤 칸은 침묵으로 가득하고 비리고 쓰고 불운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간이역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드문드문 몇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있다 이 행보는 무례하지만 지극한 것, 열차는 환상과 기억의 조..

!시 2022.02.04

시 / 나태주

시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푸른길, 2016) * 이 시가 발표된 지는 20년도 더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이 시는 제게 이 세상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쳐주었지요. 너의 행위 하나, 네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그것은 적어도 n분의 1만큼 영향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요. 어제처럼 오늘 아침도 가게 앞을 쓸었습니다. 그만큼 오늘의 지구도 깨끗해졌겠지요.

!시 2022.01.27

수형전(手形轉) / 김경주

수형전(手形轉) 김경주 벽으로 손이 가고 있다 손에서 새가 흘러나온다 손은 어둠 속에서 고도를 갖는다 손에서 우리가 눈을 뜨면 우리는 새벽에 한 쌍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비밀이 많은 깃털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벽 속의 새처럼 새 속에서 나는 파득거린다 오늘는 내 손가락 끝에 앉아 있는 새를 너라고 부른다 시는 내 손가락 끝의 해발에 앉아 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다른 쌍을 찾는 새처럼 어둠 속에서 해발을 못 느끼는 한 쌍의 손 한 손은 새가 되어 네 얼굴을 덮고 싶다 나를 만졌던 네 손을 숨기고 싶다 너는 어떤 인간인가 눈을 감고 내가 내려앉는 들에서 ―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중에서

!시 2022.01.24

구리 / 안현미

구리 안현미 누군가 정성으로 아니 무심으로 가꿔놓은 파밭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파 한단을 다듬는 동안 그동안만큼이라도 내 생의 행빛이 남아 있다면, 그 햇빛을 함께해줄 사람이 있다면,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일쯤은 일도 아닐까 무심으로 무심으로 파 한단을 다듬을 동안 망우리 지나 딸기원 지나 누군가 무심으로 아니 정성으로 가꿔놓은 파밭 지나 구리 지나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하얗게 하얗게 파꽃이 피는 동안 여름과 초록과 헤어지는 동안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중에서

!시 2021.11.15

시간들 / 안현미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

!시 2021.11.12

안개사용법 / 안현미

안개사용법 안현미 안개 핀 호수를 건너 태백 이전으로 날아가는 시간들, 날아가 아픈 이마 위에 놓여질 착한 물수건 같은 시간들, 그 이마 위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를 미열들, 그 미열들을 끌어안고 안개꽃이 되고 있는 저 여자 제 꼬리를 문 물고기 같은 여자 한때 나였던 저 여자 활엽수 같은 웃음소리를 지닌 저 여자 '안개라는 건 누군가가 혼자서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십자말풀이처럼 안개를 사용하던 한때 나였던 저 여자 안개를 끓여 모유처럼 배부르게 먹이던 여자 그 안개에선 극지까지 다녀온 바람의 냄새가 나고 말라죽은 나무의 이야기가 우러났다 그 안개를 '사랑'이라고 사용한 건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안개가 열일곱 묶음의 안개꽃이 된 건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

!시 2021.11.12

해파리 섬 / 여한솔

해파리 섬 여한솔 손을 담그면 돌 같은 것이 만져진다. 단단한 미래가 부서진 일이다. 해풍에 빌려나온 기체가 다시 새나 언덕으로 들어가 흐른다. 뻐를 바른다. 가시나무가 자란다. 바다의 밑바닥 맨 아래 유리컵의 둥근 밑동을 본다. 물에 번진 피와 해양생물의 닮은꼴 휘감는 것들은 은은하다 꿈의 물질처럼 아름다운 테두리를 떠올린다. 첨벙 뛰어든 소리 오래된 섬에 오래된 할머니가 있다. 능선을 따라 흰 새가 울음을 떨어트린다. 조류가 바뀐다. 부드러운 독이 자라서 맑은 해파리, 해파리 가장자리가 날카로운 돌을 지난다. 그때 나는 해변에 앉아 부서진 조개를 주웠다. 긁힌 바닥 얼음장 같은 믿음을 깨고 얼음장 같은 믿음 조각들이 찌르고 깨트려 찾는 무언가가 단단히 상처나는 동안 곡선은 빈자리를 채운다. 바다 위에..

!시 2021.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