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걸음 스무 걸음, 그리고 여름 열 걸음 스무 걸음, 그리고 여름 박상순 너를 꼭 데리고 갈게. 나도 꼭 데리고 가줘. 내 몸속에서 자란 조개들을 꺼내 조개들의 입을 열고, 그 조개들이 한 입씩 베어 물고 있었던 내 몸속의 조각 구름을 만들고 ,구릉을 만들고. 단단한 조개껍데기들 위로 달리고 달려 고운 길을 만들고, 다.. !시 2018.06.22
심해어 / 진수미 심해어 진수미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고 눈을 반쯤 감은 현실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액자처럼 세계를 껴안은 어둠이 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하염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있고 납작 엎드린 고요가 있고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시 2018.06.21
두 사람 / 박상순 두 사람 박상순 누군가의 다리가 반짝인다. 은빛 허리가 반짝인다. 숲속에 누군가의 머리 쪽에서 네가 나타난다. 숲속의 은빛 입술을 지나 네가 나온다. 내가 달린다. 너도 달린다 숲의 끝까지 달려갔다가 뒤돌아선다. 숲의 끝에서 너도 멈춘다. 뒤돌아선다. 내가 다시 달린다. 너도 달린.. !시 2018.06.20
창문들 / 문성해 창문들 문성해 큰집에서 제사 마치고 택시로 돌아오는 새벽 검은 산속에 창문들 몇 환하다 눈만 퀭한 것들은 슬프다 밤마다 푸른 아가리로 지붕도 벽도 처마도 다 삼켜버리는 창문의 식성 늙은 당신은 추억을 말하고 있다 환한 창문처럼 달이 테두리가 둥근 창문인 달이 따라오고 있다 .. !시 2018.06.18
성가신 사람 / 이영광 성가신 사람 이영광 사람은 귀찮고 성가시지만 사람 앞엔 '어떤' 같은 수식어쯤 할 수 없이 붙여야겠지 사람이 곁에 없으면 편하고 홀가분하지만 거기에도 '대체로'같은 수식어가 달라붙어 있다 진드기처럼 곁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귀찮다 없는 사람이 성가시다 눈이 감기고 고개가 꺾.. !시 2018.06.17
높새바람같이는 /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 !시 2018.06.16
불 켜진 창 / 나희덕 불 켜진 창 나희덕 불빛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문이 아닌 창 쪽으로 가서 집 안을 들여다본다 남편과 큰아이는 장기를 두고 있고 접시에 남은 과일은 아직 물기 마르지 않았고 주전자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다 작은 아이는 자는가 나는 한마리 나방인 듯이 창문에 부대껴 서서 생각한다 그 .. !시 2018.06.10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 이장욱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이장욱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 !시 2018.05.16
새벽비 / 김영승 새벽비 김영승 오늘 새벽도 뻐꾸기 울음은 들린다 닭장 속의 수탉도 여러차례 목청 큰 울음을 울었고 참새떼가 날아와 소나기처럼 시원한 울음을 부어놓고 갔다. 아닌게 아니라 새벽비가 후득후득 듣고 있다. 언제였던가 그 어느 때였던가 그 새벽비처럼 그렇게 맑은 눈물을 흘릴 수 있.. !시 2018.04.15
달빛 쏟아지는 집 / 김영승 달빛 쏟아지는 집 김영승 죽은 사람의 옷처럼 구름이 펄럭펄럭 흐른다. 마른 나뭇잎이 옥수수 잎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그 어느 불빛 있는 곳에선가 젖먹이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개가 짖어대고 나는 이 황량한 구월동의 거친 길을 걸으며 내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짖고 있는 .. !시 2018.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