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몰라 묻노니 / 박재삼 세상을 몰라 묻노니 박재삼 아무리 눈으로 새겨 보아도 별은 내게는 모가 나지 않네 그저 휘황할 뿐이네. 사랑이여 그대 또한 아무리 마음으로 그려보아도 종잡을 수 없네 그저 뿌듯할 뿐이네. 이슬 같은 목숨인 바에야 별을 이슬같이 볼까나. 풀잎 같은 목숨일 바에야 사랑을 풀잎같이 볼까나. 진실로.. !시 2010.01.13
꽃단추 / 손택수 꽃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나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것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 !시 2010.01.13
이끼 / 나희덕 이끼 나희덕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 푸른 옷 한 벌 입혀주고 떠났습니다. 다행입니다. 고운 .. !시 2010.01.13
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자리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 !시 2010.01.13
새벽밥 / 김승희 새벽밥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별들이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는 새벽밥 집을 나서는 식구들의 가슴엔 사랑 한 고봉 !시 2010.01.13
겨우내내 움츠렸던 / 조정권 겨우내내 움츠렸던 조정권 겨우내내 움츠렸던 마로니에 나뭇가지에 움이 돋기 시작하더니 툭툭 불거지기 시작하더니 요 얼마 전까지는 물이 서서히 비치기 시작하더니 며칠 사이는 물빛이 뚜렷하게 보이더니 저마다들 몇 밤만 지내면 나온다는 소리까지 들리더니 오늘은 일제히 움을 찢고 새파랗게 .. !시 2010.01.13
주유소 / 윤성택 Ceslovas Cesnakevicius Photography 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 !시 2010.01.12
산경 / 도종환 < Photo by 황금물고기> 산경 도종환 하루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네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 !시 2010.01.12
여기에 우리 머물며 / 이기철 여기에 우리 머물며 이기철 풀꽃만큼 제 하루를 사랑하는 것은 없다 얼만큼 그리움에 목말랐으면 한 번 부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필까 한 송이 꽃이 피어 들판의 주인이 될까 어디에 닿아도 푸른 물이 드는 나무의 생애처럼 아무리 쌓아 올려도 무겁지 않은 불덩이인 사랑 안 보이는 나라에도 사람이 .. !시 2010.01.12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어떤 채용 통보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 !시 2010.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