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척, 아프다 / 길상호 모르는 척, 아프다 길상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을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 !시 2010.01.14
오래된 질문 / 이덕규 오래된 질문 이덕규 땅 파고 씨앗 심는 일이 흙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면 그 질문 곱씹어 뱉어 제 새끼 입에 넣어주듯 푸릇푸릇 올라오는 싹은 답이다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것인지 질문과 답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모른 척하지 않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일이 .. !시 2010.01.14
봄 / 김광섭 봄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 !시 2010.01.14
한순간 / 이정자 한순간 이정자 꽃이 막, 꽃봉오리를 여는 한순간 나무가 주렁주렁 열매를 완성하는 한순간 무던히도 그리던 너와 내가 눈맞춤하는 한순간 전심전력 우주의 기운을 끌어당겨 불을 붙이는 집중의 한순간이 어느 생애도 있어 꽃이면 꽃 나무면 나무 사람이면 사람의 한생애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절정의.. !시 2010.01.14
한 아름의 실감 / 유홍준 한 아름의 실감 유홍준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내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안고 싶다, 안아보고 싶다 실감, 한 아름의 실감이여 (허공은 백번 안아보아도 허공!) 가늘고 날씬한 여자는 싫다 아름에 꽉 차는 오동포동한 여자가 좋다 마흔 셋, 드디어 나도 실감을 느끼는 나이 실감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 !시 2010.01.14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 !시 2010.01.14
슬픔 / 알프레드 드 뮈세 슬픔 알프레드 드 뮈세 나는 힘과 생기를 잃었다 친구와 기쁨도 잃었다 나의 천재를 믿게 하던 자존심도 잃었다 내가 진리에 눈떴을 때 그것이 나의 벗이라 믿었다 내가 진리를 이해하고 느꼈을 때 이미 그것이 싫어졌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고 진리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 !시 2010.01.13
밀물이 내 속으로 / 나희덕 밀물이 내 속으로 나희덕 쌓고 또 쌓고 쌓는지도 모르고 쌓고 쌓는 것의 허망함을 알면서 쌓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로 쌓고 이것도 먹고사는 일이라고 말하며 쌓고 부끄럽다 얼굴 붉히면서도 쌓고 때로 공허함이 두려워서 쌓고 지우지 못해 끊지 못해 쌓고 바닥도 끝도 없음을 쌓고 또 쌓고 어느 .. !시 2010.01.13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이름 부르는 일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해질녘이면 떠오르는 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을 허공에 대고 가만히 불러봅니다. 창밖의.. !시 2010.01.13
꽃잎 / 나태주 꽃잎 나 태 주 활짝 핀 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만나서 웃었다 눈이 꽃잎이었고 이마가 꽃잎이었고 입술이 꽃잎이었다 우리는 술을 마셨다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그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와 사진을 빼보니 꽃잎만 찍혀 있었다. 만나는 동안은 두 사람 모두 그 안에서 함께였건만.. !시 2010.01.13